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천 해전 (문단 편집) == 전투의 전개 및 경과 == 1차 출동 당시 [[옥포 해전]], [[적진포 해전]] 등을 치른 후 일본 수군은 이전에 치러진 조선 수군과의 해전에서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서해안으로 진출하기 위해 계속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지켜보던 이순신은 6월 3일 [[이억기]]의 함대와 함께 출동해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힐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5월 27일, 경상 우수사 [[원균]]이 "적선 10척이 사천을 출발해 노량으로 향했다."는 공문을 받고 [[이억기]]에게는 먼저 출전할테니 따라오라는 공문을 띄우고 출전, [[이순신]]은 이틀 후인 5월 29일 노량(露梁)에 도착, [[원균]]이 이끌고온 [[판옥선]] 3척(...)과 함께 연합해 사천으로 향했다. 해안선을 따라 이동 중이었던 이순신과 원균 연합 함대는 사천 선창으로 도망치는 일본군 척후선 1척을 발견, 격침시킨 뒤 계속 나아가 사천 포구에 이르렀다. 선창에는 일본군 대선 12척이 매어 있고, 선창 뒷산에는 일본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순신 함대가 접근하자 일본군은 완강히 저항하며 맞섰다. 마침 썰물 때라 전선을 포구에 댈 수 없어 아군 함대는 작전상 후퇴하며 적군 일부를 먼 바다로 유인하였다. 왜선이 아군의 대형 전함인 판옥선이 활동하기에 유리한 해역까지 따라오자, 이순신 함대는 갑자기 뱃머리를 돌려 다시 일본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최전방 돌격선의 임무는 [[거북선]]이 맡았다. 이순신은 아군 주력선인 판옥선보다 먼저 거북선을 적진에 들여보내 천·지·현·황(天地玄黃) 등 총통과 각종 함재 화포를 집중적으로 발사하였다. 이에 놀란 왜군 함대는 지리멸렬해 사천 포구 쪽으로 도주하였고, 그러는 사이에 만조가 되었다. 거북선에 이어 밀물을 따라 포구에 도착한 판옥선에서도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하자, 일본군은 배를 버리고 산 위로 도주하기에 바빴다. 이 와중에 수많은 일본군이 죽고, 포구에 있던 왜선 가운데 10척이 아군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나머지 2척은 패잔병들이 타고 도망갈 때 소탕하기 위해 일부러 태우지 않고 남겨 둔 채 ~~[[YOU JUST ACTIVATED MY TRAP CARD]]~~ 함대를 사천만 입구의 모자랑포로 옮겨 그 곳에서 밤을 지냈다. 물론 단순히 함정을 판것 뿐만 아니라 모든 배를 불태우면 도망친 일본군 수군이 인근 마을을 약탈할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배 몇척을 일부러 남겨 적들이 내륙으로 도망가지 못하게 심리적으로 잡아놓은 것이기도 하다. [[파일:external/www.newminjoo.com/2012052937549303.jpg]] 나머지 2척을 타고 도주하려던 일본군 패잔병은 6월 1일 새벽 배와 함께 불에 타 죽거나 목이 베어졌다. 이 해전에서 일본군 2,600명이 도살되었고, 13척의 왜선도 모두 격침되었다. 조선군 측은 이순신의 군관인 나대용과 봉사 벼슬을 했던 종군 장수 이설이 적의 총탄에 맞았고, 이순신도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다. 부상 인원 세 사람 모두 기함에 승선해 있던 지휘관들이다. 이는 이순신의 기함이 조총의 유효 사거리 안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순신의 기함이 조총의 유효 사거리에 들어갔던 것은 [[임진왜란]]의 해전 중 옥포해전을 제외하면 항상 조총의 사거리에 노출 되어 있었다.[* 2차 출동 이후의 승첩 장계를 보면 대장선에서도 항상 조총에 의한 사상자가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지휘관이라고 해서 항상 후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솔선수범하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당포파왜병장(사천 해전에 관한 일도 보고되어 있다.)에서는 '그 가운데는 간혹 [[순왜|우리 나라 사람들도 저들과 섞여서 쏘았으므로]] 신은 더욱 분하여 노를 재촉하여 앞으로 나아가...'라는 대목이 있다. 그 외에도 거북선이 첫 출전이라 좀더 가까이서 지휘를 하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다음은 이순신이 1년 후 유성룡에게 보낸 편지이다. 전투가 끝난 후에 수술로 총탄을 제거하고[* 이때 총알이 5~6cm나 박혀있었다고 한다.] 치료했으나 총상을 입은 지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상처가 아물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부상 자체가 가볍지 않은데다 당시의 소독 및 외과 치료 수준이 열악했고 전시 상황에서 제대로 안정을 취하지 못하고 격무에 시달리는데다 본인의 나이까지 적지 않아서 제대로 회복이 안되는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 '살피지 못한 동안 기운은 어떠하십니까. 전에 두 번이나 주신 글을 받고 나아가 뵙고 겸하여 적을 토멸할 계책도 말씀드리려 하였으나, 접전할 때에 '''스스로 조심하지 못하여''' 적의 총알에 맞아 비록 죽을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어깨뼈를 깊이 상한데다 또 언제나 갑옷을 입고 있으므로 상한 구멍이 헐어서 진물이 늘 흐르기 때문에 밤낮 없이 뽕나무 잿물과 또는 바닷물로 씻고 있지만 아직 쾌차하지 못하여 미안합니다. 군사들을 거느리고 길을 떠나실 날이 언제인지요. 나랏일이 매우 다급하게 되었는데 병이 이와 같아서 북쪽을 바라보며 길이 통탄할 따름입니다. (후략)'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